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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지문]성궤는 왜 숨어버렸을까? (1부~2부)

니코데무스 2020. 3. 12. 02:00

제목 / 저자 : 신의 지문 / 그레이엄 핸콕

원제목 / 저자 : The Sign and the seal : The Quest for the Lost Ark of the Covenant / Hancock, Graham

 

1부 전설

1983년, 저자는 에티오피아에서 수도사를 만나 언약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성서에서의 언약궤 이야기는 모세가 야훼께 직접 받은 계명의 돌판을 담은 것으로서, 다윗이 언약궤를 모실 성전을 그토록 짓고 싶어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고, 결국 솔로몬이 세운 성전에 언약궤가 모셔졌다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그 즈음, 그 곳에서 영화 레이더스(1981)가 개봉하여 보게 되었다.

https://youtu.be/YcR9k8o4I0w?list=PLZbXA4lyCtqoqyxguk9c23sqxBMyi4xS_&t=1

 

에티오피아의 근현대사를 보면, 1974년 멘기투스가 혁명으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독재를 해 오다가 1991년 티그레 인민해방전선(에티오피아국민혁명민주전선, EDRF)이 승리한 상태이다(1992 책 출판 당시. 그 이후 여러 부족이 참여하는 정부가 들어섰으나, 주도권을 쥔 티그레국민해방전선의 독주가 계속되며 다른 부족들은 차별과 인권탄압을 비난하며 반정부 시위를 펼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멘기투스의 홍보작업차 1983년 에티오피아를 방문하게 된다.

악숨 방문 중 여러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언약궤가 에티오피아에 전해지게 된 이야기. 4C경 기독교가 프루멘티우스 주교에 의해 전해지게 된 이야기. 기독교 이전의 거석문명(오벨리스크)이 존재 했었다는 이야기 등.

또한, 솔로몬왕을 만나러 왔다고 알려져 있는 시바여왕이 에티오피아인이었으며, 솔로몬왕과의 사이에 메넬리크라는 아들이 있었고, 성년이 된 그 아들이 언약궤와 함께 에티오피아로 돌아와 언악궤를 성모마리아교회에 보관(~AD372) 해왔는데, 성전이 한 번 파괴되고(AD530) 다시 재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시바여왕으로 부터 해서 언약궤가 에티오피아로 옮겨지게 된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 바로 에티오피아의 역사서인 [Kebra Nagast]이다. 또한 팔라샤(Falasha) 지방의 토착 유대인들도 만나보았다. 그들이 언약궤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에티오피아 교회마다 언약궤의 모조품이라며 가지고 있는 타보트(Tabot)는 정말로 언약궤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에티오피아 사제가 타보트를 옮기는 장면(from Wikipedia)

 

2부 성궤와 성배

1989년, 저자는 휴가차 가족들과 프랑스의 샤르트르 성당을 방문하였고, 그 곳에서 시바여왕의 이콘을 보게 된다. 1134년에 완공된 사르트르 대성당의 남쪽 현관에 시바여왕의 조각상이 있는데, 남쪽현관의 건축시기(13세기초)는 바로 [Kebra Nagast]의 편찬시기와 일치한다. 흑인노예와 함께 있는 시바여왕, 그리고 달구지에 실려가는 상자 혹은 궤(Ark)가 공교롭게도 대제사장의 원조라고 알려진 멜기세덱과 시바여왕 사이에 배치된 점, 멜기세덱이 들고 있는 성배(그리스도의 피를 담았다는 성배는 오페라 파르지팔의 주요 소재가 된다), [파르지팔]과 [Kebra Nagast]와의 유사성.

(본문에 실려있는 흑백사진을 보다 자세히 찾아볼 수 있는 사이트)

https://digital.library.pitt.edu/islandora/object/pitt%3AFCSP21935360/viewer

 

Inner column statues: Bases - The Ark Returned- Detail | Digital Pitt

 

digital.library.pitt.edu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사이트 입니다.

 

Chartres Cathedral: Sculpture of the North Porch

 

www.medart.pitt.edu

바그너의 오페라로 더 알려져있는 [파르지팔]의 원작에 대해 위키백과는 아래와 같이 설명해주고 있다.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Parzival)은 중세 고지 독일어로 쓰인 운문체 장편소설로서 궁정문학에 속하고 추정하건대 약 13세기 초에 지어졌다. 이 작품은 운율을 맞춘 시행 25,000쌍으로 이루어졌고 현대판으로는 책 16권으로 나뉘었다.

줄거리는 모험을 통해 성배의 왕이 되어가는 주인공 파르지팔과, 아더왕의 기사가 되기 위해 위험하고 엄격한 시험을 치르는 가반(Gawan)이라는 인물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파르지팔]의 출판시기와 줄거리 그리고 기타 여러 정황들을 종합하여, 성배 그리고 그것이 숨겨져 있다고 알려진 비밀의 장소 테레 살베셰(Terre Salvasche)가 바로 언약궤와 그것이 숨겨져 있는 장소를 암시한다고 가정하였다. 그 열쇠가 되는 지점이 바로 12세기 비잔틴 제국에 널리 알려진 "프레스터 요한"이라는 미지의 인물의 보냈다고 알려진 편지이다. 성배를 다룬 작품의 대표작으로 파르지팔 외에도 성배이야기(크레티앵 드 트루아)라는 것도 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1099년. [파르지팔]이 발표된 것이 1182년, 예루살렘이 살라딘에 의해 함락된 것이 1187년, [파르지팔]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파르지팔]에 등장하는 템플기사단(성전기사단)이라는 단체는 실존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예루살렘의 모리아산에 본부를 두었다고 한다. 기사단 단원들을 보면 상파뉴 출신, 사르트르에 영지를 가진 자, 그리고 바로 성배이야기의 저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했던 일들은 무었이었을까? 십자군의 탄생을 중세기에 있었던 가장 큰 비극이라고까지 말하여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서구사회에서는 1312년 갑자기 해산되어버린 템플기사단(성전기사단)에 대하여 여러가지 추측, 전설, 음모론이 오랫동안 유통되었으며, 비밀결사단체로 유명한 프리메이슨과도 연결되어 진다고 한다.

이 즈음의 예루살렘의 풍경이나 소리는 어떠했을까? 영화와 음악을 한 편씩 소개해보자면...

Kingdom Of Heaven - Official® Trailer [HD] 

Marcabru (1100-1150): Pax in nomine Domini

영화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별도의 설명은 필요없을 것 같고,  음악은 1130~48년경에 활동한 가스코뉴 출신의 시인이자 음악가인 마르카부뤼가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여 노래한 곡이라 한다.

아무튼, 기사단이 예루살렘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1130년대부터 프랑스에서는 출처도 알 수 없는 고딕양식의 건축물들이 갑자기 지어지기 시작한다. 그것도 폭발적으로!!

샤르트르 대성당(위키백과)

고딕 양식과 템플기사단, 그리고 언약궤... 이 세가지는 아무 관련도 없어 보이지만, 템플기사단이 예루살렘과 프랑스를 왕래하던 그 시기에 프랑스에는 고딕양식이 유행하였고, 그 시기에 에티오피아에서는 랄리벨라 왕자가 배다른 형 하르바이 국왕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 망명 와 있었다. 따라서 템플기사단과도 어떻게든 만남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1185년 랄리벨라는 고향인 에티오피아로 돌아가 왕위를 찬탈할 수 있었고, 수도 로하의 이름도 랄리벨라로 바꾸었으며 그 유명한 11개의 암굴교회(Rock-Hewn Church)도 짓기 시작한다. 16세기 에티오피아를 방문했던 프란시스코 알바레즈 신부는 동굴교회가 "백인들에 의해 24년 동안 만들어졌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그 백인들은 누구였을까?

Rock-Hewn Churches, Lalibela (유네스코 제공)

랄리벨라의 암굴교회 몇 곳의 3D 영상을 Zamani Project라는 연구단체가 제공하고 있다.

https://www.zamaniproject.org/site-ethiopia-lalibela-rock-hewn-churches.html#header5-d

 

Site - Lalibela Rock-Hewn Churches

Funders > Andrew W. Mellon Foundation > World Monument Found (WMF)

www.zamaniproject.org

 

에티오피아에 기독교(유대교가 아닌)가 전파된 것은 AD331 프루멘티우스에 의해서였으며, 악숨의 (오래된) 유대교도들과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악숨의 유대교도들은 그들의 종교를 언제 받게 되었을까?

유대인들의 동물에 의한 희생제의 역사는 유구하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야훼의 명령이 한 예이다.) 누구나 어디서나 행하여지던 이 일이 유대민족이 에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에 이르렀을때 언약궤를 모셔둔 성막에서만 행하여졌으며, 요시아왕(BC640~609)에 이르러 성전 이외에서의 모든 형태의 제사는 금지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BC5세기경부터 부림제, BC2세기 부터 헌당제의 제의가 생겨났고 그 이후 계속 지켜오고 있다. 현재, 에티오피아의 유대인들은 부림제와 헌당제를 모르고, 또한 동물에 의한 희생제를 계속 지켜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에게 유대교가 전해졌던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한편, 악숨제국은 BC1000경부터 아라비아반도 남쪽과 에티오피아 북부 지역에 셈족인 사바인들이 모이면서 시작되었고, 3C~6C경에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며, 6C~16C의 기간동안에는 주위의 이슬람세력에 포위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4C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유대교전통을 따르고 있었으며, 12C 랄리벨라 왕자가 템플기사단과 함께 이스라엘에서 귀국하여 이복형으로 부터 왕위를 빼앗았다. 그런데 랄리벨라 왕자와 함께 귀국했던 템플기사단은 무엇을 하고자 하였을까?

랄리벨라 왕자와 함께 에티오피아로 들어온 템플기사단에 대해 더 알아보면, 1119년 창설되고 1128년 트루아 종교회의에서 공인을 받았으며, 1307년 10월 13일 전원체포된 이후 기사단은 헤체되어버렸다. 해체되기 직전인 1306년, 악숨제국으로 부터 대규모의 사절단이 프랑스 아비뇽을 방문하였고, 그 곳에 머물고 있던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5세를 만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들 사이에 어떠한 대화가 오고갔는지 기록은 없지만 연결 가능성은 있다고 예상된다. 프랑스에서의 템플기사단이 헤체되고 나서 남은 세력들은 영국의 스코들랜드 혹은 포르투갈의 그리스도기사단으로 명맥을 잇게 된다. 영국으로 간 세력들은 훗날 프리메이슨과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포르투갈에서는 그리스도기사단이라는 이름의 세로운 세력으로 거듭나게 된다.

유럽에서 대항해시대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항해왕자로 알려진 엔리케(Infante Dom Henrique) 왕자인데 그는 그리스도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하였다. 그가 사망한 1460년에 태어난 바스코 다 가마는 이후 희망봉을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하며 본격적인 대항해시대의 문을 연 인물이다. 인도항로 개척을 위한 첫 항해를 시작했던 1497년 그는 그리스도기사단을 상징한 깃발과 프레스터 요한에게 보내는 신임장을 가지고 출발했다고 한다. 한편 1487년 포르투갈의 주앙2세는 페로 데 코빌란(Pêro da Covilhã, 쿠비양)이라는 측근을 에티오피아(프레스터 요한의 나라라고 믿어지는)로 파견하였고 1492년 드디어 아바시니아(에티오피아)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그 곳에서 영영 억류와 연금상태로 살게되어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1520년 포르쿠갈의 첫 공식 사절단이 에티오피아를 공식으로 방문하게 되는 데 이때 동행했던 알바레스 신부가 랄리벨라의 암굴교회, 그 중에서도 성조지교회의 지붕에 그리스도기사단의 십자가 모양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된다. 즉, 포르투갈의 그리스도기사단은 끊임없이 에티오피아로의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곳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있었을까?

그 이후 1528년 그라뉴가 이끄는 이슬람세력의 침공을 받게 되고, 1535년 언약궤를 모셔두었던 성모마리아교회는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언약궤는 이미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에티오피아를 구하기 위하여 포르투갈에서는 450녕의 신식 군대를 파견하는데 그 대장은 바스코 다 가마의 아들 돈 크리스토반이었고, 이슬람세력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저지하게 되었지만 결국 돈 크리스토반과 그라뉴가 모두 전사하면서 침공도 끝이 나게 된다. 이후 1600년대 중방 성모마리아교회는 재건이 되고 언약궤도 다시 봉안되었지만 (언약궤를 끈질기게 찾고 있다고 의심을 받게 된) 포르투갈인들은 에티오피아 내에서 점점 배척을 받게 된다.

영국, 특히 스코틀랜드 쪽의 기사단의 움직임은 어떠했을까? 프리메이슨 회원이라고 알려진 제임스 브루스는 1730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많은 인생의 경험들을 겪은 이후 나일강의 발원지를 찾으러 에티오피아를 방문하게 되는데, 1770년 1월 18~19일에 악숨을 방문하였을 때, 바로 언약궤가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축제의 기간이었다. 그 후 제임스 브루스는 에티오피아에서 [The Books of Enoch]라던가 [Kebra Nagast]의 필사본등 중요한 문화재를 들고 나와, 옥스퍼드 대학교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남긴 여러 기록들 중 언약궤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었다'. 즉,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언약궤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2020.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