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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건의 신학이야기] 8장 교회론

니코데무스 2018. 12. 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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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성자/신학/김동건의 신학이야기 8장 교회론


교회에서 진행중인 성경공부(BTBS, Big Tree Bible School) 과정의 가을학기에 신학 강좌가 개설되었고 매 주 묵직하면서도 달콤한 수업이 진행중에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다루어진 내용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내용들을 되새김하거나 다루어지지 않은 내용들에 대한 제 개인 생각들을 남겨보고자 합니다. (개인 생각이므로 신학적 오류 또는 읽는 분의 생각과도 다를 수 있습니다.)



출처: http://nicodemus.tistory.com/entry/김동건의-신학이야기-7장-예배와-신앙?category=469282 [그것만이내세상]

교회에서 진행중인 성경공부(BTBS, Big Tree Bible School) 과정의 가을학기에 신학 강좌가 개설되었고 매 주 묵직하면서도 달콤한 수업이 진행중에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다루어진 내용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내용들을 되새김하거나 다루어지지 않은 내용들에 대한 제 개인 생각들을 남겨보고자 합니다. (개인 생각이므로 신학적 오류 또는 읽는 분의 생각과도 다를 수 있습니다.)


"8장 교회론" 입니다. 매 주 출석하는 교회이고 잘 알고 있을 것 같지만 막상 교회의 기원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인지 그 이후인지 제도화된 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까지는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복습해보자면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후 예수님을 고백하는 가시적인 공동체를 교회의 기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톨릭이 로마의 공인을 받고 국가종교가 되고 시스템을 갖추기까지의 시기는 "교회"라는 개념에 대해 분명 여러가지 혼란을 겪었을 것으로 추측되지요. 그래서 그 당시 교부들의 교회에 대한 언급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분명 큰 가르침을 줄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주후 1~2세기의 교부들 중에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나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us)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ubi christus ibi ekklesia)'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카톨릭에서는 "주교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구절로 바뀌어 사용되기도 했구요.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표현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의 우리가 "교회" 하면 떠올리는 '건물'이나 기타등등의 이미지는 어쩌면 부차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화들짝 놀랄 수 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교회가 아니다! 라는 주장은 결코 아닙니다.)

자료들을 찾다보니 그 이후에도 교회의 의미와 관련되어 여러 논쟁들이 있었더군요.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그 후로도 타락하거나 배교한 성직자들이 행하는 성례전이 유효한가의 문제 등으로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에도 카톨릭은 루터가 교회(=카톨릭)를 벗어났다고 주장하였지만 루터는 카톨릭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칼뱅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받아들여지며, 또 성례전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그대로 거행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된다'고 카톨릭과 루터와의 싸음을 요약하였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라는 단어의 헬라어 단어 에클레시아(ekklesia)는 원래 보통명사로 소집 명령을 받아 모인 군대, 아고라에 회의하러 모인 시민들의 회합등을 폭 넓게 가리키는 단어였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시기에 박해가 심할 때는 시장터나 가정집, 심지어 공동묘지(카타콤)에서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지요. 박해의 시대가 끝나고나서 다시 모일만도 했을텐데 오히려 지중해 전 지역에 흩어져 교회(에클레시아)를 세웠던 것 같습니다. 즉, '선교'가 시작된 것이지요.

우리는 어느덧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사이버교회'라는 낯선 용어도 심심치않게 들려오네요. 인터넷으로 접속된 채 모니터로 보이는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진정한 예배라 할 수 있을까요? 현대사회에서의 인간관계의 문제에 대해 다양한 분야에서 원인과 해결책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는데, 성도간의 교제(koinonia)가 그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하지만 인간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으며, 또 인간 세상 속의 교회 역시 그 모습은 변할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진리를 좇는 기독교인들이지만 생각이 습관처럼 어디엔가 머물러 있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찬양을 좋아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그런데 이 찬양을 할때 저는 늘 이런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이 함께 하고 있을터이니 나도 그 곳으로 달려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구나" 마치 찬송가 323(부름받아 나선 이몸)을 부를때 마다 느껴지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과도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소개했던 초대교회 교부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니 그 곳에 지금 이 순간 교회가 존재해 있고 또 누군가 이미 그 곳에 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 어떤 모습으로든 그 사역에 동참하게 될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ubi christus ibi ekklesia(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하나님아버지의 마음"

지난 주 강의주제였던 7장 예배와 신앙편에 대한 글의 뒷분에 언급했던 영화 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가 다시 생각납니다.



[관련도서]

김동건의 신학이야기